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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10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4/20 [06:53]
법회록(法會錄)8-① ‘통찰’은 스스로 해야 한다

통찰! 天問天答 110

법회록(法會錄)8-① ‘통찰’은 스스로 해야 한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4/20 [06:53]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법회록(法會錄)8-① ‘통찰’은 스스로 해야 한다
 
몇 해 동안 ‘자각’하기 위해, ‘자각’하고 있음을 알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洞察)에 대한 당위성(當爲性)을 이야기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할 수가 있는 모든 문제와 한계(限界)와 번뇌 망상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無知)로부터 비롯되어졌으며, 무지는 어떤 실체성(實體性)을 가지고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꿈속(무의식상태)에서나 있을법한, 즉 단지 ‘자각’의 결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둠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빛’의 부재(不在)이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통찰’을 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疑問)을 통해 탐구(探究)를 하는 것이며, 이러한 탐구가 깊어지면, 지금까지 여겨왔던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이다’라는 육체와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가 행위적(行爲的)으로 되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통찰’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렇게 여기고 있던 ‘지금의 나’, 즉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이다’라는 자기 정의(定義)와 규정을 내리고, 내려진 정의에 따라 ‘나는 이렇게 살아 왔고,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렇게 살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일말의 여한(餘恨)도, 일말의 미련(未練)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참다운 ‘통찰’의 시작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자기규정과 자기정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통찰’이 심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생적 한계로 인해 스스로를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찰’을 한다는 그 자체로, 지금까지 당연히 믿어 왔던 육체와의 동일성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되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정말 ‘누구이며, 무엇일까?’, 즉 ‘누구이며, 무엇이다’로 살아왔지만, 살아갈 것에 대해서 일말의 여한도 미련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통찰’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스스로 돕는 자는 하늘이 돕는 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언컨대 어떤 위대한 마스터라 할지라도, 위대한 스승이라 할지라도 대신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상관관계를 받아들여, ‘통찰’의 시작이 결국은 ‘자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과 ‘자각’을 통해 스스로 알게 되면, 그 ‘앎’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앎’으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잠을 자던지, 소위 말하는 육신적인 죽음과는 상관없이 분명한 항상적 ‘깨어 있음’으로 깨어 있는 ‘의식’이 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알지 못했던 ‘앎’은, 마치 상황에 따라 개종(改宗) 하듯이 바뀌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찰’은 과정에 있어서 필요조건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무지는 단지 ‘통찰’과 ‘자각’의 결여일 뿐이지, 무지가 원죄를 가리키고, 나락으로 떨어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세주, 마이 뜨레아, 미륵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상상으로 존재한다할지라도 더 나아가서 존재가 어떻게 비존재적인 측면을 구원(救援)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을 하여야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결국은 각자(各自)의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꿈을 꿀 수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 꿈을 내가, 즉 ‘나’가 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을 꾸고 있을 당시의 지각적(知覺的) 주체는 비록 육체와의 동일시(同一視)로 인해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지각적 주체를 비롯해서 지각되어지는 모든 대상들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이치와 모든 원리가 ‘나’의 뜻이자 의지라는 것은 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어떤 일 보다 우선하여 자신에 대한 통찰을 시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야 하며, ‘깨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통찰’을 심화(深化) 시키고 심화(心畫) 할 때, 어느 순간 묘한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은 ‘통찰’에 의한 결과로써의 ‘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과로써의 ‘분리’라면 ‘통찰’ 그 자체가 원리로서 ‘진리’라는 말이 되며, 그러한 모순으로 인해 사실은 경험되어질 수가 없으며, ‘나’는 감각기관에 의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착각과 자각’, ‘오해와 이해’, 분리와 합일, 부조화와 조화, 균형과 치우침 등, 모든 사건과 현상들이 ‘내가 한다’ 범위 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더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 미묘한 ‘분리’는 단지 ‘깨달음ㅡ깨어 있음’의 혜(慧)로 알 뿐이더라는 겁니다.
 
자 그러니 이 혜(慧)의 측면에서 한번 돌이켜 보세요. 이 측면에서 깨달음을 얻는 경험, 깨닫는 경험이라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이와 모든 사물을 포함하고 있는 허공(虛空)은 기본적 관점(觀點)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경험의 주체들도, 모든 경험조차도, 모든 사건조차도 허용을 하고 있지만 정작 허공은 어떤 경험에 대한 증언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경험에 대한 증언은 기준관점에 비추어서 투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험에 대한 증언은 반드시 판단되어질 것이며, 판단되어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며,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깨달음ㅡ깨어 있음’이 한 개인에게 한 사람에게 한 수행자에게 귀속될 수가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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